월간 마음의 언어


A.A. 멤버들의 소중한 경험담

이 책자는 단주 생활과 12단계 프로그램을 하면서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소중한 경험담을 월간지에 실어 드립니다. 아래 주소로 우편(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20길 6, 정우빌딩 2층   (우) 07307) 또는 이메일 : aakoreagso@gmail.com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밝은 마음 그룹 공개 모임 경험담, 2019년 7월호 中

안녕하세요. 알코올 중독자 도봉 이입니다.
이번 중곡동 밝은마음26주년 공개모임에서 스피커스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처음 모임 왔을 때 이렇게 스피커스를 하시는 분들을 보고, 처음에 굉장히 부러워했었습니다.
첫 번째로 부러워했던 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떨지 않고, 술 먹었을 때 애기들을 이렇게 떳떳하게 할 수 있나 그게 부러웠구요. 두 번째는 술을 마시지 않아야 이 자리에 설 수 있잖아요.
어떻게 술을 몇 년 동안, 혹은 몇 개월 동안 마시지 않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을까 그게 제일 부러웠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단주한 지 2년 조금 넘었는데요. 이렇게 부러워하고, 조금 뿌듯해 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4녀 중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서울에서 막내로 태어났는데, 보통 막내딸이라고 하면 예쁨을 많이 받고, 귀여움을 많이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첫째 언니에게 사랑을 많이 주셨고, 아빠는 둘째 언니에게 사랑을 많이 주셨어요. 첫째 언니는 첫째 딸이니까 둘째 언니는 공부도 잘하고, 모든 면에서 제일 잘했어요, 저희 4녀 중에 제일 자랑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저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그 때부터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집에 오면 저는 혼자 있었습니다. 유치원에서 행사나 어떤 일들이 있을 때면 큰언니가 학교 수업 중간에 나와서 저를 데리고 오고, 같이 그림 대회 가서 그림 그리고 그랬던 것이 기억이 나네요. 저는 그래서 어렸을 때 엄마가 같이 오거나, 유치원 끝나면 데리러 오는 친구들을 굉장히 부러웠던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술을 마시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선배들이 제 친구들을 지목을 하면서 언제 어디로 돈을 가지고 와라 시켰었습니다. 그때는 놀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호기심도 있었어요. 왜 언니들이 우리를 불렀을까 했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어요.
맥주 1000cc를 시켜줬는데요. 같이 마시던 친구들은 화장실을 가서 토를 하고, 구석에 앉아서 울고, 횡성수설하고 그랬는데, 저는 멀쩡했었어요. 저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내가 이 선배들에게 잘 보이면 학교생활 편하게 할 수 있겠다'라는 그런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되고, 술 취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그랬었어요. 정말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1000cc를 마셨는데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막 헤~ 좋고 막 이런 기분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술이 무슨 맛인지, 기분이 좋은지, 기분이 나쁜지 이런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저는 중 2학년 때 술도 처음 마시게 되고, 담배도 피기 시작했고, 그렇게 주말마다 선배들과 술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가고 저는 고등학교를 가서도 너무 새로웠었어요. 저는 집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 뭐냐 하면 저희 언니들은 그냥 평범한 언니들이었습니다. 학교 잘 다니고 끝나면 학원 가고 때에 따라서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교를 가는 그런 언니들이었는데, 저는 중학교 때부터 사고를 치고, 파출소에 불려 가면 엄마, 아빠가 와서 저를 데려가고 이러다보니 고등학교도 실업계를 가게 됐었어요.
언니들처럼 인문계도 아니고 실업계를 가게 되었는데, 아빠가 그때 저한테 그러셨어요. ‘너는 우리 집안의 수치라고, 내가 정말 너 때문에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닌다’고 그러셨어요. ‘하라는 공부하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부족한 것 없이 해주는데, 공부하나 못해가지고 창피하게 실업고등학교를 가냐’는 그런 말을 듣고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됐는데, 중학교 때 생활하고는 너무 다른 거 에요. 친구들도 없고, 내가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야겠다. 이런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 학교만 다녔습니다. 엄마가 도시락 싸주면, 아침에 도시락 들고 가서 쉬는 시간에 먹고, 점심시간에 자고, 학교 끝나면 집에 오고, 주말에는 또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그렇게 지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전 남편을 만나서 시집을 갔어요.
저는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전 남편을 만나면서 전라도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막 이 사람하고 새벽 1시에 만나서 짐을 싸서 도망을 갔어요. 근데 이 사람이 너무 좋다, 너무 사랑한다, 이 사람이 없으면 나는 죽을 것 같다. 이게 아니었어요.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아빠는 딸만 넷을 키우니까 지금은 조금 이해하겠는데요. '여자는 이렇게 하면 안 돼, 여자는 옷을 이렇게 입으면 안 돼, 여자는 이러면 안 돼, 여자는 이거 하면 안 돼, 이렇게 말씀하셨고, 저는 통금시간이 학교 다닐 때도 9시 반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조금만 늦게 들어가면 아빠가 소파에 앉아서 인상 쓰시고 화를 내셨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저는 벗어나고 싶었어요.
이 집에서 나갈 방법은 이 남자랑 도망가서 사는 거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새벽 1시에 야반도주를 했어요. 그렇게 도망가면 저는 온전히 제 것이 생길 것이라 생각했어요. 저는 큰언니 둘째언니가 입던 옷이나 신발 같은 것도 셋째언니와 함께 물려 신고 그랬어요. 그리고 어떤 물건, 책들도 다 언니들 것을 다 물려 썼어요. 계속 이렇게 물려 쓰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고, 근데 내가 이 남자를 따라서 가게 되면, 나는 내 옷을 나 혼자만 입을 수 있고 내 물건들을 나 혼자만 쓸 수 있다고 생각 했었던 게 더 컸던 거 같아요.
그렇게 가자마자 저는 두 달 만에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요. 모든 게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조그마한 마을에 가서 살게 된 것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사람들과 떨어져서 그렇게 혼자 있는 것도 처음이었고, 갑자기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갖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되고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아이를 지운다는 생각도 못했고, 그렇게 해서 낳고 길렀어요.
그때 까지만 해도 저는 아이를 키우는데 너무 정신이 없었는지, 그렇게 술을 많이 먹지는 않았었어요, 가끔 남편이 맥주 사오면 집에서 먹고 애기 보고 지금은 어린이 집을 보낼 수 있지만, 제가 사는 곳은 굉장히 작은 지역이었는데요. 그곳에 어린이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근데 그곳에서도 5살이 되어야지 받아 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20살 때부터 24살까지 오로지 집에서 아이만 키웠었습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이렇게 살았는데요. 집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까 아이 엎고, 논밭에 가서 실참(새참)주고 간식주고 집에 돌아오고, 이렇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어떤 소개로 보건소에 들어가서 잠깐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면 되겠다' 생각했었는데요.
몸이 안 좋아서 여기저기 검사를 했는데 제 나이 25살, 혈액 암이 걸린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친정으로 올라와서 1년 6개월 동안 항암치료하고 방사선치료하고 그렇게 투병생활을 했는데요. 그렇게 하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돼서 다시 시골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제가 병원에 있고 친정에서 왔다갔다 생활을 하는 중에, 남편이 다른 여자와 동거를 하고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죽일 듯이 미웠고 정말 저주 했어요. '저 미친 인간 술 먹고 저렇게 운전하고 다니는데, 죽지도 않나 그냥 죽어버리지 보험료나 타서 아들하고 나하고 편하게 살게 죽어버리지' 저는 둘이 살고 있는 집도 알고 있었어요. 어디서 둘이 만나서 술을 먹고 어디서 뭐하는지도 알고 있었는데, 때려 업고 싶었는데 저는 나서질 못했어요.
제가 거울을 봤는데, 저는 그때 항암치료로 인해서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고 약 부작용으로 몸이 부어있었고, 피부 또한 부작용으로 온몸에 여드름같은 것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거울을 봤더니 예전의 제가 아닌 거에요. 코는 볼때기에 파묻혀서 보이지도 않고, 얼굴은 온통 여드름이고,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고, 내가 봐도 여자가 아니고, 내가 봐도 괴물인 것처럼 보였어요.
그 때부터 항상 마음속으로 '저 인간을 죽여야 내가 사는데'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부터 술을 마시면서도 항상 떳떳하지는 않았었어요. 중학생이, 그것도 여자가 술을 마시는 건 그렇게 당당하지는 않은 일이잖아요. 호기심으로 먹을 수는 있지만 그게 계속 됐었고, 그러고 나서 핑계라는 핑계를 잡고... 항암치료가 끝나고 4년 후 까지 계속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의사 선생님이 '이 병은 완치가 아니다. 그냥 흔적이 없어진 것뿐이지, 항상 조심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년이 지나면 안정권에 접어든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때부터 술을 마셨어요. 이제 어느 정도 암은 나랑 멀어진 것 같았었고, 이제 술을 마셔도 되겠구나! 했는데 그때도 떳떳하지 않았어요. 아팠던 사람이 저렇게 힘들게 고생하고 어떤 과정 속에서 병원치료하고 온 사람이 무슨 술을 먹지 이런 생각이 있어서 항상 다른 사람하고 술자리를 할 때도 10잔을 먹으면 2잔만 먹은 척 했고, 저쪽 구석에 가서 더 많은 술을 마셨어요. 근데 저는 알코올 중독자가 될 체질이었는지 술이 되게 쌨던 것 갔에요. 여자들이 어느 정도 먹으면 헤~ 하고 취하는데, 저는 한 번도 막 취해서 길에서 소리를 지른다거나 난리를 핀다거나 그러질 못했어요.
나중에 생각을 해보니까 남편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지역사회다 보니까 굉장히 작은 동네에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러다 보니까 제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거에요.쟤는 누구 엄마다 쟤는 누구 각시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제가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던 거 같아요. 술을 먹고 요만큼만 움직여도 아는 사람이고, 이쪽으로 움직여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름 조심스럽게 먹었던 거 같아요.
제가 아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남편의 그런 부적절한 관계를 알았을 때도 그랬고, 나중에도 그랬고 남편의 외도와 도박, 폭행은 그렇게 쉽게 고쳐지지는 않더라구요. 그걸로 인해 항상 싸움이 되었고, 싸움을 하다보면 두 마디 이상이 안 되는 거에요. 남편이랑 저는 13살 차이인데요. 주의에서 사람들이 그랬어요. '띠 동갑이 넘고 어리고 예쁘고 이러니까 남편이 엄청 예뻐하겠네.' 이랬어요. 근데 전혀 아니었어요. 저랑은 집에서 한마디 이상 하지 않았고, 두 마디 이상 가면 서로 싸움이 되고 폭력이 왔다 갔다 하고 결과가 너무 안 좋은 거에요.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싸워 본거랑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누구를 그렇게 미워하고 누구를 그렇게 저주 했던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제가 남편과 17년을 살다 이혼을 했는데, 같이 산거는 4~5년 정도 밖에 되질 않았던 거 같아요. 제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저희 친정엄마는 살아계셨는데 엄마가 제가 살던 곳이 좋다고 그쪽에 집을 하나 지으셨어요. 그래서 김장도 하고 봄에 와서 왔다 갔다 하신다고 집을 지어놨는데, 저는 '옳다구나 잘됐다' 나는 남편 밥도 해주기 싫었고, 아이를 데리고 그 집에 올라가 살았어요. 아이만 데리고 그러면서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둘이 지냈는데요. 제가 처음 얻은 직장은 조그만 병원이었는데, 그곳에서는 평범하게 일을 했습니다. 일 끝나면 통닭에 맥주한잔하고 집에 가고 그랬는데, 제가 두 번째 직장이 복지센터 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렇게 큰 무리의 사람과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제 인생에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어서 그때 학력이 고등학교 학력 밖에 안 되어서 조그만 조무사 자격증 하나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은 굉장히 쎄드라구요. 4년제 대학에 어떤 어떤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제 자신으로서는 너무 꿀렸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과 같이 어울릴 수 있을까, 같이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회식이 많이 있었는데 제가 내세울 것은 술을 마시는 것이었어요. 같이 일하시는 여자 선생님이 세명이 계셨는데, 한명은 아예 못 마시고, 한명은 조금만 마셔도 취하시고, 한명은 그럭저럭 먹었어요. 근데 저는 잘 마셨어요. 그래서 어디 마을 대표 나와서 26개 마을이 모여서 워크샾이나 교육 같은 것을 할 때, 교육이 끝나면 술자리가 있었는데, '어디 대표 나와' 하면 항상 제가 나갔었어요.
각 지역별로 대표적인 술을 가지고 나왔는데요. 그러면 저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마셨었어요. 돌아가면서 병째로 마시고 그랬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데, 그때는 제가 굉장히 자랑스러웠어요. 여자인데다 젊고 일어나서 술을 마시면 사람들이 '우와~ 우와~' 박수를 치는데, '아 내가 정말 내가 잘 먹고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느꼈었어요. 일로, 실력으로는 같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면 '나는 뭐가 뛰어나지? 나는 술 먹고 노는 걸 잘해.' 이렇게 택했던 거 같습니다. 이렇게 직장생활을 했었습니다.
나중에 술 문제가 비롯된 것은 제가 계속 직장을 다니면서 저는 11년 동안 일을 쉬지 않고 일을 했었습니다. 항상 6시 정각이면 끝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농사를 짓는 집이었어요. 밭도 많고 논도 많았고, 하우스는 하우스대로 일이 엄청 많았어요. 남편은 항상 6시 20분까지 어디로 뭐 사가지고와 저는 출근 할 때도 밭에서 일하는 곳에 8시 20분에 김밥, 물, 냉커피, 다 가져다 주고 그러고 출근을 했습니다.
처음에 제가 알코올중독자라 1단계를 말하는데요. 첫 단계는 시인을 했어요. 내가 술을 많이 먹고 굉장히 술에 무력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다음 삶을 수습할 수 없었다라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어요. 저처럼 열심히 산 사람은 없었던 거 같았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밥해서 먹고, 아이 학교 같이 가고 밭에 이것저것 다 챙겨주고 출근하고, 직장이 끝나면 또 논밭에 가서 일을 하고, 비닐하우스에서 밤 11시 까지 불 켜 놓고 일을 하고 그 다음날 또 일을 하고 일을 하고, 이렇게 했는데 내가 무슨 술 좀 먹었다고 삶을 수습 못할 정도는 아닌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굉장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어요. 그렇게 하면서 저는 직장생활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는요. 아침에 출근할 때 차를 가지고 15분, 20분가는 거리였는데, 제가 어느 날부터 캔 맥주 2개를 사서 빨대를 꼽고 먹으면서 출근을 하는 것이었어요. 하나는 먹으면서 출근하고, 하나는 화장실에 숨겨놓고 오전 중에 먹고 그러고, 점심시간에 직원들과 밥을 먹으면서 맥주를 먹으면 그날은 그냥 좋은 날이고 아니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끝나면 술을 사서 퇴근을 하고 그랬었어요.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른 여자들에 비해 다른 직장사람들에 비해서 많이 먹는 수준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나중에 남편이 어떤 사업을 따와서 오리 농장을 하게 되었어요.이게 일이 커지니까 제가 일을 그만두고 이 일을 도와야 한다고 했었어요. 저는 너무 싫었어요. 왜냐하면 남편하고 저는 두 마디 이상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별거 아닌 별거를 하고 있었는데, 부딪히기 싫은데 내가 일을 하는 것은 유일한 탈출구 이었거든요. 근데 내가 이 인간하고 하루 종일 농장에 붙어서 일을 해야 된다. 너무너무 끔찍했어요. 생각만 해도... 근데 제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남편이 저에게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했었어요. '그 직장에 어떤 놈하고 바람이 났지 그 놈 때문에 너 일을 그만두지 않는 거지 그 돈 없어도 살 수 있는데 왜 일을 그만두지 않고 내 일을 도와주지 않는 거야!' 엄한 꼬투리를 잡고 의처증이 심해지다 보니까 블랙박스를 뒤지는 건 물론이고, 핸드폰을 뒤지면서 저를 압박하기 시작했어요.
그래 그러면 나도 그만두고 그냥 쉬엄쉬엄 일을 하면 되겠다 싶어서 그만 뒀어요. 제가 살던 곳은 술 문화가 굉장히 관대했어요. 일을 하다가 아침 8시에 술을 한잔 먹어도 사람들 인식이 알코올중독자다? 이게 아니고 밭일이 힘드니까! 더우니까! 추우니까! 힘드니까! 한잔 먹고 해야지 이런 게 일상적이었어요. 저는 오히려 일을 그만두고 술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게 뭐하나 찾은 거 같았어요. '아! 이제 눈치 안보고 퇴근 시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술을 먹어도 되는구나' 아침에 농장 가서 일 조금하다 집에 와서 술 먹고, 또 낮에 밭을 한 바퀴 돌고 집에 와서 술 먹고, 저녁에는 본격적으로 앉아서 술 먹고 이런 식으로 했었어요. 주의사람들보다 많이 먹는다 했는데, 아침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생활이 되질 않는 거에요. 저는 그 때 알코올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해장술이 뭔지도 몰랐어요. 단주라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금단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근데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전날 먹던 술을 먹으면 기운이 나고 청소기를 돌릴 수 있고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점점 더 술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저도 제가 알았어요. 저한테 술 문제가 있다는 걸 조금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가만히 있으면 몸이 미세하게 떨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집에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더니 알코올중독 검사지라고 10문항이 나와 있는 게 있어서 해봤더니 전문가와 상담하라고 나오더라고요. 저는 일도 하기 싫었고 사무실에서, 병원에서 앉아서 일을 하다보니까 밖에 나가서 논에 앉아서 풀 뽑고, 농장 가서 오리들 쫓고 이러는 것이 싫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면 내가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가게된 것이 광주에 있는 알코올병원이었어요. 저는 그런 정보는 모르고 나름대로 생각했는데 알코올병원이니까 정신과 의사가 있을 것이고, 내가 이곳에 입원을 해서 주사를 맞으면서 축났던 몸을 충전시키고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면서 2~3주 있다 보면 술을 먹지 않겠지 생각했었어요. 그러다 제가 광주에 있는 병원에 가게 되었어요. 폐쇄 병동이더라고요. 저는 몰랐었어요. 알코올병동이 폐쇄병동이고 핸드폰도 못쓰고 뭐도 못쓰고 이런 제약이 있는 것도 모르고, 제가 제 발로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어요. 처음에 병원에 들어오는 다른 환우들을 보았을 때 보호자랑 싸우고 의사랑 싸우고 이랬는데 저는 너무 좋았습니다. 제가 밥을 안 해도 되고, 일을 안 해도 되고, 아이는 어느 정도 커있었고, 저는 나한테 주는 휴식이라 생각했었어요. 제가 광주에 있는 병원에 한 달 조금 더 있다 퇴원을 했었는데, 거기서도 12단계 수업도 있었고, 빅북도보고 알코올에 대한 수업을 받았는데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나는 본격적으로 술을 먹지 않았고, 거기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은, 누구는 장롱에 숨겨놓고 먹었다. 남편 몰래 먹었다. 이러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저는 당당하게 먹었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하고는 너무 다른 거에요. 그런 말들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교육이나 수업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저는 한 달 만에 남편이 퇴원시키러 왔었는데요. 퇴원하기 싫었어요. 집에 가면 농장 가서 오리랑 싸워야 하고, 밭에 가서 풀 뽑아야 하고, 비닐 벗겨야 되고 저는 퇴원하기 싫었어요. 근데 남편이 집일이 바쁘니까 퇴원을 하래요. 그래서 가서 다시 저는 술을 먹었죠. 20일도 안 되서 마셨습니다. 그래서 또 한 번 갔다 오고 그때도 두 번 입 퇴원 하면서도 알코올에 대한 무서움을 몰랐어요. 저희 엄마가 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저는 그 때 엄마 상을 치러야 했었는데 생각이 잘 안나는 거였어요. 뜨문뜨문 생각나는 것 밖에 없어요. 장례식장에는 엄마가 아파서 돌아가셨는데, 전화가 왔어요. 눈뜨면 장애인화장실에서 기절해 있다가 옆에 보면 캔 맥주가 있었고, 친정엄마가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는 도중에 상복을 입고 그 속에 술을 숨겨서 문상오시는 손님을 피해서 제가 하루 종일 해롱해롱 하고 있으니까 언니들하고 아빠가 너 들어가서 자라고, 꼴 보기 싫으니까 나오지 말고 상주실에서 나오지 말라그랬는데, 술은 마셔야겠고, 문상객 맞을 이런 것도 없으니까 상복 속에 술을 숨겨서 장애인 화장실로 가는 거에요. 왜냐하면 장애인 화장실이 넓잖아요. 기절했다가 눈뜨면 장애인 화장실 벽에 기대어 있고, 기절했다가 눈뜨면 옆에 보면 캔 맥주 2개 있고, 지금도 그게 굉장히 엄마한테 죄송스럽구요. 정말 그때 생각하면 가볍게 말하면 철이 없고, 정말 생각이 없었던 저였던 것 같아요... 그 만큼 술에 미쳐 있었어요. 상을 치르고 온 뒤에 저의 그런 술에 대한 온갖 정이 떨어진 남편이 저보고 나는 너랑 못 살겠으니까 네 발로 기어 나가던지 네 발로 나가지 못하겠으면, 내가 너를 어디 있는 기도원 같은데 입원시켜 주겠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그랬어요.
제가 '그것이 알고 싶다'나, '추적 60분' 같은 거 봤는데, 무슨 기도원가면 사람 묵어놓고 때리고 단무지에 밥만 준다. 이런 걸 본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데 가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다음날 짐을 싸서 서울로 오게 되었어요. 근데 제가 또 서울로 곱게 오나요? 고속버스 안에서 페트병에 든 소주를 2개 사서 병은 소리가 나니까 페트병으로 된 소주를 2개 마시고 저는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더라구요. 기절을 한 거 같아요. 다행히 옆에 아들이 있었는데, 제가 눈을 떴을 때는 서울 고속터미널 앞에서 아들 무릎에 누워 있더라구요. 근데 입술은 다 터지고, 입술 주위는 피가 튀어 있었고, 앞니는 부러져 있었고, 여기 저기 긁혀 있었고, 저는 그 이후로도 아들한테 물어 보질 않았어요. '엄마 왜 이렇게 된 거야. 엄마 왜 피난거야.' 그것조차 물어보는 게 너무 창피했어요. 엄마로서... 아들이 어떻게 큰 언니에게 연락을 한 거에요. 큰언니랑 큰형부가 와서 저를 데리고 가서 그 다음날 알코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요. 그곳에서 그렇게 술에 대한 교육을 받고 술에 대해서 '술 먹으면 안 돼, 술 먹으면 안 돼' 나 혼자 다짐을 하고, 모임을 나오고 그렇게 재활 훈련을 하며 병원에서 1년 5개월 있다 나왔는데, 저는 20일 만에 또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또 세번의 재발을 했습니다. 제가 술을 끊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당당하게 살고 싶은 것도 있고, 내가 못해본 것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거 같아요. 머리도 노랗게 하고 화려하게 하고 거리도 나가 보고 싶었고, 그 전에는 그렇게 입고 머리도 그렇게 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근데 여자로서 정말 예쁘게 꾸며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근데 맨날 술을 먹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내가 꿈꾸던 게 아니었습니다. 근데 정말 내가 술 없이 한번 살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조금 조금 조금 그러면서 오늘까지 온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던 모임에서 처음에 계속 1년 넘게 병원에 있으면서 왔다 갔다 하는 모임에서 하도 제발 하니까 쪽팔려서 못가겠더라구요. 정말 창피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저한테 그랬어요. 다시 나온 거 잘했다고 모임에 오니까 괜찮아 이렇게 말해 주는데요. 저는 자존감이 낮다 보니까! 저거 또 술 퍼먹고 온 것 아니야 하는 이런 눈치를 보게 되는 거에요. 안되겠다. 해서 저희 동네에 있는 모임으로 바꾸고 후원관계 끊고 그냥 저 혼자 계속 모임만 다녔어요. 습관에 배인 건지, 병원에서 배운 건지 그냥 모임에 가자 였어요. 그래서 그냥 무조건 여기 갔다 저기 갔다 그랬어요. 그러면서 오늘만 먹지 말고, 처음엔 정말 술이 먹고 싶었어요. 한 달을 못 넘기고 3번을 재발했던 저니까 요것만 먹고 그만 먹을까! 이게 안된다는걸 3번을 시험해봤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한 달만 안 먹어보자, 두 달만 안 먹어보자 아! 정말 나 1년 칩 타는 것이 소원인데, 제가 계속 재발했던 이유는 정직하지 않았구나! 모임에 다니면서 조절음주 하면서 부정직했고, 나한테 주어진 것들에 대한 감사함이 하나도 없었어요. 집에서 지원해주고, 집에서 이렇게 해주는 것에 대해 전혀 감사하지 않았어요. 나는 병원에 있으니까 당연히 이렇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제가 모임을 완전히 다른 패턴으로 바꾸면서 후원자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됐는데요. 요번만큼은 내가 술을 끊으려면 정말 정직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갔에요. 내가 계속 부정직했으니까 재발을 하고 술을 못 끊으니까 이번만큼은 정말 잘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정말 4~5단계를 하면서 정직하려고 노력했고요. 예전에도 4~5단계를 안한 건 아니었지만, 그때도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쓰고 정말 큰 것을 작게만 쓰고 그랬는데, 후원자 선생님을 바꾸고 나서 정말 정직하게 노력했던 거 갔에요. 후원자 선생님과 프로그램을 하면서 계속 모임을 다니면서 제가 1년 칩을 받을 때 저는 세상이 제 것 같았습니다. 그 때도 감사함은 조금 뒤에 있었는데, 내가 잘해서 술 안 먹으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내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가서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저 1년 칩 받을 때 세상이 제 것 같았어요. 너무너무 좋았었어요. 지금도 2년이 지난 지금은 저와 프로그램해주시는 후원자 선생님 정말 너무 감사하고요. 정말 제가 정직할 수 있는 용의를 끌어내 주신 분이거든요. 지금까지 제가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처음 1년 칩 받을 때 내가 잘해서, 내가 잘나서 1년 칩 받은 거지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솔직히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제 자신한테 너무 자랑스러웠거든요. 지금은 정말 이 모임이 아니었다면, 모임에서 선생님들이 저한테 응원도 해주셨고요. 강북 쪽에 여자가 별로 없어서, 항상 가면 따뜻하게 맞이해주시고, 봉사할 수 있게 해주시고, 그러면서 1년 가고 2년 갔던 거 같아요. 지금도 술에서만 멀어졌지.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어요. 아르바이트 하고 모임 왔다 갔다 하고 이러는데요. 그전에 술을 많이 마셨던 사람이고, 정말 그냥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고 저 사람을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은 그냥 술 안 먹고 당당하게 떳떳하게 다닐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또 저는 혼자가 아니고 모임의 힘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그렇고 이렇게 까지 이런 자리에 나와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없었던 거 같아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알코올 중독자 도봉 이 -